2022년 5월 1일
성경: 요한복음 21:1-19
설교: 사랑으로 새롭게
시작하라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왜 이 질문을 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많은 얘기를 하실
수 있었는데 예수님은 이 질문만을
던집니다. 그것도 세번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우리는 자동적으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기 때문에 이 질문을
던지셨다고 생각합니다. 확실히, 베드로의 마음
속에는 그런 생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 질문을
자기가 예수님을 부인한 것과
연결해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세번씩이나
예수님이 같은 질문을 하니
베드로가 근심했던 것입니다. 상처를 받았다고
영어 성경에서는 번역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요한복음 21:17)
이 질문은 베드로에게는 매우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대답하기에 아주 불편한
질문이었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자기 자신에게
이 질문을 수 없이 던졌을
것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예수를 사랑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그를 부인할 수 있었는가? 한번도 아니고
세번씩이나 말이다. 나는 비겁한
사람 아닌가!
베드로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깊은
실망,
좌절,
슬픔,
후회,
이런 것들이 그의 생각을
온전히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이 자기를 버리고 도망갈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절대로
자기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을 했었습니다.
“베드로가 여짜오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마가복음
14:29)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가 한 이 말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빈 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너무나도 연약한
자기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두려움으로 가득찬
자기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버렸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이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들었을 때, 그는 자기가
예수를 부인한 것과 연결해서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베드로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베드로의 부인에 가 있지
않았습니다. 베드로의 부인에 대해 언급도
하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기에게 이전에 한 행동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앞날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베드로의 과거에 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미래에
가 있었습니다.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실
때마다 예수님은 답을 들으시고
끝에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의 생각은
베드로가 이전에 행했던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앞으로 할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용서해주기 위해서만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시기 위해서만 나타나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소명을
다시 불러 일으키시고 그를
미래에 대해 준비시켜 주시기
위해 나타나신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필요했던 것은 그저
위로를 받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기가 지금
깊이 빠져 있는 그 어두움에서
누군가가 그를 꺼집어 내주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베드로는 너무
큰 슬픔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자기 앞길은 생각하지도 못했었습니다. 그의
마음이 너무 아파 앞으로
갈 수 없었습니다. 과거에 그는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베드로가 한 행동을 보십시오. 그는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때에도 그는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그를 따르기로 결정하면서
그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버린
그 그물을 들고, 물고기를 잡으러가는
베드로를 봅니다.
이 전체 장면이 그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장면과
아주 비슷합니다.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고 하였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의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 하니
많은 물고기를 잡았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자기의 죄책감
때문에 과거에 묶여 살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은 실망을 느끼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그를 꽁꽁 묶어두고 있는
과거에서 꺼집어 내 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과거에 일어난 일들은 과거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지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살아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특히, 그것이 고통스러운
과거라면 그것은 과거에 남아있지
않고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를
그 과거의 진흙탕 속으로 끌어
당깁니다. 마치 Black hole처럼
말입니다. 우리를 그 어두운 구멍으로
끌어 당깁니다.
PTSD, 전쟁이나, 삶의
재난,
생명의 위기를 경험한 사람들이
겪는 정신질병이 있습니다. 한국말로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과거의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과거를
놓치 못하고 앞으로 가지
못합니다. 아직도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한 죄책감, 분노, 실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과거가
그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앞으로 갈 수도
없고,
새롭게 시작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과거에
모든 것을 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후회가 있습니다. 실수
투성이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과거에 매여 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바울사도가 하신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빌립보서 3:13, 14)
바울사도도 예수님에 대해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을 핍박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사도행전 9:4)
그는 예수님의 운동을 파괴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교회를 핍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그는 자기가
얼마나 큰 죄를 지었는가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해 깊이 뉘우쳤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사도행전 15:9)
그러나 그는 과거의 진흙탕
속에서 뒹굴고 있지 않았습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앞으로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바로 그것을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앞으로 베드로가
나가기를 원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이 세번
베드로에게 질문했던 것은 베드로가
세번 부인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또 다른
이유를 여기서 봅니다. 예수님은 이제
베드로에게 그의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을 말씀하셔야
하는데 그것이 베드로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번이나
망설이다가 결국 그것을 베드로에게
말해주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오늘의 이 이야기는 베드로의
과거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베드로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세번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던지신
후,
그 사랑을 확인하신 후,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요한복음 21:18, 19)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 하십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요한복음 21:19)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의 과거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미래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잘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이제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이 진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5:17)
하나님과 함께 할 때, 매일
매일이 새날입니다. 어제는 지나갔습니다. 내일을
위해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의
과거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매여 살아갑니다. 너무나
큰 상처가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기
때문에 그들은 앞으로 나가지를
못합니다. 과거에 붙잡혀 있습니다.
과거를 맡긴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과거를
하나님께 맡기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뒤를 보며 살지
마십시오. 앞을 보며 사십시오. 과거의 희생자로써가 아니라, 미래를 만드는
창조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실 때, 우리의 과거는
우리를 묶어두는 힘을 잃게
됩니다.
베드로에게 필요했던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도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랑이 그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요한일서
4:18)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 사랑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그 사랑이
있을 때 그가 앞으로
당할 혹독한 미래, 어려운 삶의
운명을 이겨나갈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사랑만이 그에게 힘을
주고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용기를 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어렵습니다. 희생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려거든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이 희생을 아름답게
할 것입니다. 우리의 희생이 사랑에서 이루어질
때,
그것은 아름다울뿐 아니라 변화를
가져오는 힘을 갖게 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해 자기의
생명을 희생할 것이지만 그 희생은
사랑에서 이루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희생이
강요될 때, 그것은 폭력입니다. 그러나
희생이 사랑 가운데 이루어질
때,
그것은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라고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때, 우리는 어려운
길을 만나기도 할 것입니다. 넘어지기도
할 것입니다. 실패도 할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실패,
좌절,
다 하나님의 손에 맡기십시오. 그리고 앞을
바라보십시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을 가지십시오. 그것
밖에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신다면 어떤 상황이 여러분에게
닥친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그것을
이겨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으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