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4월 24일
성경:
요한복음 20:19-31
설교:
나를 능가하는 신앙
도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요한복음
20:25)
아주
구체적으로 도마는 요구했습니다. 정확히 자기가 믿을 수 있는 근거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이 condition이 맞아야 믿겠다고 그는 주장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불행하게도, 도마는 거기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에게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에게 듣는 것으로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습니다. 도마는 자기가 자기 눈으로 보기를 원했습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실제로 만져보며 느끼기를 원했습니다.
그의
마음을 우리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도마는 자기에게 확신이 없는데 믿는 것처럼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정직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할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직함은 믿음으로 가는 첫 발걸음입니다. 우리의 영적 여정은 정직함에서 시작됩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척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없으면서 있는 것처럼 행동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없는 믿음을 가진 것처럼 행동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거짓된 믿음은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와 자신감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위조지폐는 진짜 화폐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위조 신앙은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지난
주에, 어떤 영어 예배 교우 중의 한 사람이 저에게 찾아왔습니다. 저희 교회에 딱 두번 나온 사람입니다. 제 아들의 직장 동료입니다. 설교에서,
모든 것이 잘 나갈 때 갖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라고 한 말이 자기에게 의미 있게 다가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질문을 합니다. 행동이 없는
소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소망과 행동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한가지라고 말했습니다. 소망이 진정한 소망이라면 그것은
반드시 행동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신앙이라면, 반드시 그 신앙은 우리에게 평화와 자신감을 줄 것입니다. 거짓된 신앙은 그것을 줄 수 없습니다. 도마는
믿을 수 없는데 믿는다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도마는 진정한 신앙을 찾는 아주 귀한 예를 보여 주었습니다. 도마의 정직함 때문에 그는 예수님을
다시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정직함으로 말미암아 부활한 주님이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도마 때문에, 도마를 위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예수님은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 때문에 갈등하고 있을 때, 예수님은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한복음 14:18)
우리가
정직하게 우리의 믿음에 대해 질문도 던지고 우리의 의심 때문에 갈등하고 있는 것, 하나님은 마다하지 않으십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질문하고 의심한다고 책망하시지 않습니다. 또한 홀로 두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도마의 갈등을 아셨습니다. 도마가 의심하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런 도마를 홀로 내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그에게 자기 자신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정직한 갈등, 정직한 갈망
- 하나님을 만나는데 필요한 것은 이것 뿐입니다.
도마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 도마가 무엇을 했습니까? 예수님의 못자국 난 손을 보았습니까?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을 넣어 창자국을 만져 보았습니까? 그것이 그가 처음에 요구했던 것 아닙니까? 그것이 없이는 믿지 않겠다고 했던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는 그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하셨는데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이런 고백을 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요한복음
20:28)
고백
중에 가장 높은 고백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예수를 감히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가장 가까이 갔던 고백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도마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며 가장 높은 신앙의 고백을 합니다.
도마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그의 믿음이 그가 보고 그가 느끼는 것에 기반한다고 착각했었습니다. 그가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깨닫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자기의 신념, 자기의 확신에 믿음이 달려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기도도 잘 되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도 경험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기적을 경험하면 우리의
믿음이 더 강해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느끼는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매우
자기중심적인 신앙이지요. 신앙이 마치 나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지요.
제가
대학교 다닐 때에 Robarts 도서관에서 공부했습니다. 토론토 대학의 도서관입니다. 13층, Red section에서 공부했습니다. 그곳은 저의 제 2의 집과도 같았습니다. 제일 높은 층이었고, 그 구석에 가면 토론토 대학 전체가
다 보였습니다. 종종 거기에 가서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저에게는 기도의 산과도 같은 곳이었지요.
하루는,
하나님의 확신이 필요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니 저에게 보여주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구름이라도
사용하셔서 사랑한다 라든지 아니면 그저 heart shape이라도 주시면 흡족하겠습니다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무 것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sign을 그때 주셨다 할지라도 저는 곧 그것이 그저 우연이었겠지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이 오는 것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사람들이 sign을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그런 신앙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을 보자마자, 그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마태복음 16:4)
그들이
기적을 보았을 때, 그들은 자기에게 믿음이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의심만 가득차고, 어려움만 임할 때에 그들은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했고, 믿음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만약
믿음이 여러분에게 달려 있다면 여러분이 어떻게 느끼고, 여러분이 어떻게 보는가에 달려 있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매우 흔들리는 믿음일 것입니다. 믿음은
나를 능가하는 것입니다. 내가 느끼고, 내가 알고, 내가 경험하는 것을 능가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을 보십시오. 거기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는 버림받은 느낌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예수님은 이렇게
외치십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누가복음 23:46)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마지막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부재를 경험했을 때도, 버림 받는 것 같은 경험을 했을 때에도, 그가 어떻게 느꼈던,
상관 없이, 그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모습을 봅니다.
지난
목요일, 한국어 예배 장로님께서 우리 목사들에게 점심 대접을 해주셨습니다.
Covid 기간 동안에 수고하였다고 대접을 해 주셨습니다. 식사하면서 장로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민
초창기부터 교회를 섬겨 오신 장로님이십니다. 제가 젊었을 때에는 신앙이 있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그 신앙으로 이것도 하고, 저것도 했습니다. 내가
신앙이 있다는 것이 중요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이가 들어서 나에게 오는 단어는 맡긴다는 단어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자식들에게 맡기고,
목사님들에게 나의 삶을 맡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신앙은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에 대해 많이 알고, 하나님에 대해 열심을 갖고 있고, 확신을 갖고 있는가 하는 것보다,
그저 단순히 하나님 손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한번은
아버지가 자기 아들이 문제가 많기 때문에 예수님께 찾아 왔습니다. 아무도 그를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제자들도 고쳐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와서 그는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하면서, “할 수 있으면, 아들을 고쳐 주소서”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랬더니 그 아버지가 믿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나는 연약하고, 나의 믿음은 보잘 것 없으나, 나의 아들을 주님께 맡깁니다. 이 맡기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도마는
아주 정직했습니다. 자기의 의심에 대해 정직했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첫 걸음이기는 하지만 그는 신앙이 자기에게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아직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난 후에, 비로서 그의 신앙은 내가 믿습니다를 넘어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자기 자신을 맡기며
고백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여러분,
때로는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돌아가는 일들을 보고, 우리가 경험하는 어려운 일들을 볼 때에, 때로는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고, 우리의 신앙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욥이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 23:8, 9)
그는
어디서도 하나님을 볼 수도 없었고, 느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다음에 뭐라고 고백합니까?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욥 23:10)
그의
믿음은 온전히 하나님께 기반을 두고 있고, 하나님에게만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우리가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때 믿음이 조금씩 우리 속에 형성이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우리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 - 우리를 능가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