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17일
성경: 욥기
38:1-7
설교: 고통에
관하여
우리는 모두 욥에 대해
잘 압니다. 욥
하면 고통을 당한 사람으로 압니다. 욥의
고통 뒤에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욥은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의를 인정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주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는 세상에 없느니라.” (욥기
1:8)
여기서 욥의 모든 문제가
시작됩니다. 사탄이 이런 질문을 하나님께 합니다.
“사탄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울타리로 두르심 때문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의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의 소유물이 땅에 넘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
(욥기 1:9-11)
여기서 우리 인간에게
던져진 질문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있는가? 다 뭔가 받은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인가?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에 대한 우리의 반응일 뿐인가?
욥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자기 자식을 잃었고, 자기의 재산을 모두 잃었고,
나중에는 자기 자신의 건강마저도 잃게 되었습니다. 자기 부인은 그런 욥을 보며 저주하고 떠나버렸습니다.
욥이 과연 계속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 욥기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경험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무언가 욥이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다고 주장하려고
합니다. 그의 친구들은 욥에게 죄가 있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쪽으로 그들의 argument를 몰고 갑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고통이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가장 이해하기 쉬운 해석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동적으로 고통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렇게 고통을 해석했습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요한복음 9:1, 2)
그러나 욥기는 이런 고통에
대한 해석을 반박하고 있습니다. 욥기는 의로운 사람도 고통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나에게 뭔가 잘못된 것이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나쁜 일이 좋은 사람들에게
일어납니다. 우리 주님이 바로 좋은 예입니다.우리 주님은 그것을 정확히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의로운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가 고통스럽게 죽는 그 모습을 보고 그 처형을 책임 맡고 있던 로마 군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백부장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이 사람은
정녕 의인이었도다.”
(누가복음 23:47)
예수님의 고통을 보면서
그는 그의 의를 보았습니다. 그의 악함을 보지 않았습니다. 왜 나쁜 일이 좋은 사람에게 일어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신비입니다. 하나님도 답을 하시지 않습니다. 욥에게 고통이
일어난 후에 욥과 세 친구 사이에 많은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욥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십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그의
고통에 대한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신에 하나님이 만드신 아름다운 창조를 욥으로 하여금 보게
합니다. 그리고 욥에게 묻습니다. 이 모든 것을 네가 하였느냐?
거기에 있기나 하였느냐? 내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창조하였는지 네가 아느냐?
하나님은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 내 마음 속에 그리어 볼 때 하늘의 별 울려 퍼지는 뇌성
주님의
권능 우주에 찼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주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내 영혼이 찬양하네
하나님께서 이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셨으나 우리는 그가 어떻게 하셨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 아름다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통하여 또한 아름다운 삶을 만드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혼돈과 어두움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신 것처럼, 우리의 고통의 혼돈과 어두움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실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왜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가 하는 질문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통하여 무엇을
이루실 것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할 때, 우리는 Why me 라는
질문을 합니다. 거기에는 답이 없습니다. Why me 라는 질문을 하기 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통해 무엇을 이루실 것을 바라보십시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좋은 것을 많이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선물들을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가족, 친구, 좋은 직장
사업, 건강, 영생 -
다 감사해야 할 제목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좋은 선물들이 우리가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이라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기
위해 그것들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 선물들은 선물의 가치를 잃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주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실망하고
좌절할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믿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마저 하게 됩니다.
우리의 좋으신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환경에 있든지 아름다운 삶을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어떤 것도 우리의 기쁨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어떤 고통도 우리의 기쁨을 앗아갈 수 없습니다. 초대 기독교인들은 감옥에서도 찬양을 하였고 감사를 하였습니다. 어떤 고통도 그들의 기쁨을 앗아갈 수 없었습니다.
이제 고통은 더이상 우리를
주장하는 힘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고통은 우리에게 해를 입히지 못합니다. 고통은 우리를 도와줄 뿐입니다. 우리가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은 바로 그 자리에 계십니다. 우리의 고통 뒤에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우기 위해 우리의 고통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이제 고통을 새로운 눈으로
보십시다. 고통을 두려워하기 보다 고통 뒤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적인 일을 볼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고통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고통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4)
고통이 더이상 우리를
두렵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인생의 도전을 피해 도망갈 이유를 더이상 우리에게 주지 않습니다. 고통이 우리에게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힘 있는 삶, 진취적인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우리가 환난을 당한다면
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나 라고 하셨습니다. 고통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담대하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우리도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세상을 이긴 자는 성공을 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고통을 이긴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