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6일 주일
성경: 야고보서
5:13-20
설교: 기도할
때
제가 좋아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
Bridge
Over Troubled Waters라고 하는
노래입니다.
-
가사가
참 아름답습니다.
When you're weary (피곤하고)
Feeling small (보잘 것 없이 느껴질 때)
When tears are in
your eyes(당신의
눈물을 닦아주리라.)
I'll dry them all
I'm on your side (나는 당신 곁에 있겠소)
Oh, when times get
rough(어려운
시간을 지날 때)
And friends just
can't be found (어떤
친구도 찾아볼 수 없을 때)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lay me down
(험난한 파도 위에 놓인 다리처럼 나 자신을
당신을 위해 깔아 드리리라)
When you're down
and out (당신이
우울할 때)
When you're on the
street (길에서
어두운 길을 방황하고
When evening falls
so hard (캄캄한
밤이 찾아올 때)
I will comfort you
(당신을 위로 하겠소)
I'll take your part
(당신과 함께 하겠소)
Oh, when darkness
comes (어두움이
짙게 깔리고)
And pain is all
around (고통이
당신을 둘러쌀 때)
Like a bridge over
troubled water
I will lay me down
3절이 있지만 원래는 두절 밖에 없었습니다. 3절을 첨가한 것은 노래가 너무 짧다고 Garfunkel이 얘기했고 또한 약간 종교적인 면을 Tone down 하기 위해 그랬던 것입니다.
노래와 가사는 Paul Simon이 썼는데 그 당시 자기가 듣고 있던 복음 성가에 감동을 받고 이 노래를 썼던 것입니다. New Orleans의 음악가 Allen Toussaint는 말하기를,
“이 노래는 두 작가에 의해 쓰여졌다: Paul Simon and God”
우리가 기도할 때, 바로 하나님께서 험한 파도 위의 다리가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No
one takes it from me, but I lay it down of my own accord.” (요한복음 10:18)
여기서 이 “버리노라”가 바로 lay it down 입니다. 우리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lay down 하신 예수님, 바로 우리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숨을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주십니다. 우리를 안아 주시고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오늘
말합니다.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야고보서 5:13)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들을 때, 많은 경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실상 많은 경우에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너무 지치고 연약해져서 기도할 수도 없을 때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말합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야고보서 5:16)
나는 의인이 아닌데 하는
생각 때문에 주저할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자격이나 도덕적인 자격을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예 기도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는 그 자체가 의로운 행동입니다.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누가 다른 사람에게 신경을 씁니까? 이 세상은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그런 세상을 따르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아니라 사랑과 care로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갈라놓고 지배하고, 고립 시키고 제거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합하고 섬기고, 받아들이고,
용납하고, 친구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 노래가 노래하듯,
친구를 찾아볼 수 없을 때 우리는 기도하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같이 노는 친구가 되지는 않더라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영적으로 함께
하여주는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해 기도한다고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십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런
놀라운 약속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마태복음 7:7, 8)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자신감이 생길 것이고 그 자신감에서 오는 평화를 발견할 것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삶이 불확실 할 때마다 저는 기도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저에게 두개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걱정하고
내 속에 근심으로 가득차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내 자신의 힘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발견한 것은 내 속에 근심으로 가득 채우면 곧 내가 더 어두운 곳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나 홀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나도 모르게 술수를 쓰게 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기도하기를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고요한 자신감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던가 아니면 내가 해야 할 일을 보여 주십니다.
기도를 우리의 삶의 한
부분이 되게 해야 합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까지 우리는 모든 것을 기도하며 해야 합니다. 꼭 신앙이 좋아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대단히 신앙 좋은 사람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인간으로써 누구나 다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기도는 하는 행동이 아니라,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우리 인간은 약하고 우둔합니다. 또한 우리가 다루려고 하는 문제가 우리의 힘으로 쉽게 다룰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역부족을 느낍니다. 그러니 기도하지 않으면 우리는 무기력함과 절망 속으로 빠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기도라고 하는 선물을
주셨습니다. 무기력함과 절망 속으로 빠지기 보다 우리는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는 그 결과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벌써 원하는 결과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원하는 바를 하나님께 아뢰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 내가 그 결과를 주장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누가복은
22:42)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원하는
바를 아뢰셨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이것이 기도하는데 매우
중요합니다. 결과를 내가 주장하려고 하면 우리는 기도의 가장 기본적인 목적을 잃게
됩니다. 기도의 힘을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기도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주위의 기도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한다고 하지만 절대로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결과에 대해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지 못하면 좌절하고 기도를 포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는 가장 아름다운 기도 였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받지 못했지만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했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때, 우리는 평화를 경험하게 되고 더 큰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매우 제한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작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더 큰 세상으로 이끄십니다. 그리고 더 큰 것을 볼 수 있게 하십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의 삶이 열리게 됩니다.
지난 수요일에, 사도행전 1장을 공부하면서 초대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살펴 보았습니다. 그들은
Wait and Pray, 기다리고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며 기다릴 때,
성령을 받았고, 그들은 더 큰 세상을 보았습니다. 자기들이 감당치 못하는 일까지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그저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낭비가 아닙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시간입니다.
고통이 우리를 내리칠
때, 그것이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우리로부터 자신감을 앗아갑니다. 무기력해지고 절망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무엇이
제일 힘든지 아십니까? 무엇 보다도 고통은 우리로부터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현존감을
앗아갑니다. 하나님이 더이상 우리와 함께 있지 않는다고 느끼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더이상 나를 돌봐 주시지 않는다고 느끼게 합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하나님을 느낄 수 없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고통이 우리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욥이 느꼈던 것이었습니다.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욥기
23:8, 9)
그것이 바로 고통이 우리에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통 속에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어둠 속에 홀로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고통이 우리의 시야를 가리기 때문에 보지 못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거기에 계십니다. 때문에 우리는
느낌으로 기도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때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욥이 어디를 봐도 하나님을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다고 고백할 때, 그때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느낄 수 없다고 볼 수 없다고 고백한 바로 후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기 23:10)
기도는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에 관한 것이지 내가 어떻게 느끼는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가 가는 길을 아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순금 같이 되어 나오게 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욥은 자기 자신에게 확신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자기의 기도에 확신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 확신이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아십니다.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확실히 우리의 길을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십시오. 평화와 고요함을 경험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 속에서 어떻게 역사 하시는가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많은 놀라운 일들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놀라게 될 것이고, 우리의 눈이
열리게 될 것이고, 바로 그때 우리의 신앙이 형성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여러분 마음 속에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God becomes re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