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1년 7월 25일)
요한복음 6장 1-21절
“광야와 바다에서도”
우리 교회는
Lectionary Readings 에 따라서 매 주일 설교 본문을 정하고 있습니다. Lectionary
Readings 이라는 것은 일단의 신학자들이 모여서, 성경 전체를 3년 주기로 나누어서, 매 주일 구약, 시편,
복음서 그리고 서신서 등 4개의 성경구절을 볼 수 있도록 편성한 것입니다.
Lectionary Readings 을 따라서 설교를 하면, 교회력을 따라 갈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요즘, 교회들은 그들의 편리와 사정에 따라서 교회력이나 절기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는데, 우리 교회는 교회력에 담겨진 귀함을 지키고 가르치고자 Lectionary Readings 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본문도 Lectionary Readings 에 따라서 정해진 복음서 말씀을, 설교 본문으로 택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두 가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들이 함께 편성되어 있다 라는 것입니다.
일명, 오병이어의 이야기와,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하나로 묶여서 본문이 되었습니다. 각가의 이야기만으로도 설교가 되고 메세지가 있을 터인데,
두 개의 이야기를 한꺼번에 다루어야 하는 것에 대해서, 고민과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라는 질문으로 부터 시작해서,
신학자들은 어떠한 목적으로 이 둘을 하나의 본문으로 추천했을까? 그리고 우리에게
주시는 메세지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생각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신앙에 대한 메세지를 주고자 하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또는 믿음은,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하고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Commodity 가 아니라, 반드시 있어야 하는 Necessity 입니다.
인생을
살면 살수록,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이런 생각은
더욱 확고해 집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얼마나 귀한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수요예배에서 야고보서를 묵상하고 있어서 그런지, 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더욱 깨닫게
됩니다. 믿음을 생각할 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제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이 믿음 때문에,
우리는 많은 것들을 극복할 수 있었고, 오늘에 이르게 되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코빗이
시작된지 어언 17개월이 지나고 있는데, 이 코빗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하고 단련시키는 과정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그렇고, 공동체적으로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있었기에, 좌절하기보다 한번 더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 있었기에, 포기하기 보다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을 수 있었습니다.
현장예배가
재개되었을 때에, 예배당에 나아와 예배드리면서, 감격해
하는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 교회에 대한 사랑이 간절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믿음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는 믿음이 더욱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과정이 되었다면, 누구에게는 믿음이 퇴보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 라는 것입니다. 누구는 이렇게 말합니다. 평소 각각의
믿음이 어떠했는지가 이 코빗으로 인해서 드러난 것이 아니냐 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은,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감당할
부분이지,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각 사람은, 자신이 걸어가야 할 신앙의 여정을 충실히 가면 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서로에게 격려가 되고 도전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시간에 달려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에
대해서 좀더 생각해 봅시다. 우선 믿음과 관련된 오해들이 있습니다. 믿음을 하나의 액서세리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나에게 있는 여러가지 덕목 중에 하나로 생각한다
라는 것입니다. 교양있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덕목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하나의 덕목 중에 하나로 생각한다 라는 것은, 아직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믿지도 못하고 있는 반증인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의 삶의 일부분이기 보다,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또 다른
오해로 인한 태도는, 하나님을 무슨 도깨비 방망이 처럼 여겨서, 내가 필요할 때만 찾고 휘두른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요행입니다. 믿음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 라는 말 안에는 수만가지가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를 믿지 않는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어제 토요새벽에서 알아본 것처럼, 나를 비울 때에,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고 내려 놓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여전히 살아 있어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믿는다 라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당장, 돌아가는 것이, 내 뜻대로, 내 원대로 되지 않는다고,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기에,
포기하지 않고, 감정에도 휩쓸리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고 기대한다 라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믿는다 라는 것은,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지, 하나님이 주시는 복 자체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첫번째 이야기인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도,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이,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만을 보고
거기에 매료 되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 그분만을 보고 있는지 라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믿음의 관점으로 매우 다른 태도입니다.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는데, 무엇 때문이라고 합니까? 2절입니다.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요 6:2)
그들이
예수님을 따라온 것은, 이전에 예수님께서 병자들에게 행하신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기적 (miracle)을 표적 (sign) 이라고 합니다. 기적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적이 가리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라는 의미가, 이 표적 sign에 들어 있습니다. 손가락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물체가 더 중요하다 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만 보았지, 예수님에 대해서는
깊은 이해가 없었고, 그래서 믿음도 아직 없었던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오천명을 먹이고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가 되었을 때에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14절입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요6:14)
여기서도
또 “표적” 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Sign 입니다. 예수님보다 예수님이
주신 복만을 보았다 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그 선지자”
라고 하는 것은, The Prophet 으로서, 모세를 뜻합니다.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킨 모세처럼, 또
다른 선지자가 나타나서 그들을 구원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대단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지만,
정작 예수님이 누구신지는 아직 잘 모르는 상태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베푸신 기적 때문에, 그들의 눈이 멀게 되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들의 의도와 심중을 알고는 혼자 산으로 가셨습니다.15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요6:15)
여기서
말하는 임금은 이 세상을 통치하는 왕입니다. Political King 입니다. 그렇다면 이어서 나오는 두번째 이야기는 믿음에 대해서 무엇을 전하고 있을까, 질문하게 됩니다. 두번째 이야기를 살펴 보십시다. 광야에서는 큰 무리가 있었지만, 이젠 바다를 항해하는 소수의 제자들입니다. 광야에서는 배고픔이 문제 였다면, 바다에서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을 오늘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슬라이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요6:17-18)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제자들이 경험하고 있는 그 어려운 현실에,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찾아 오셔서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요6:20)
영어로는,
It is I; do not be afraid 입니다. 그런데, 원어로, It is I 를 ego eimi 라고 하는데,
이는 I Am 이라는 뜻입니다. 이 I
am 은,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답하신 이름이었습니다.
I am who I am,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 하였습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을 보십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출3:14)
즉, 예수님은, 내가 천지를 창조한 여호와 하나님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병이어 이야기에서 사람들이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뭐라 했습니까? “그 선지자” 라고 하고 “임금”을 삼고자 했는데,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분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자 마자, 제자들은 기뻐하며 예수님을 그들의 배로 영접하였습니다예수님의
목소리에 담겨져 있는 위엄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나는 하나님이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하신 목소리가
제자들의 두려움을 몰아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와 같이 예수님의 음성과 관련한 이야기들이 몇 더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는 양의 이야기가 있고, 부활 하신 후에 예수님을 찾아 나선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마리아야”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 (요20:16)
그만큼,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과 매우 가까이서, 함께 하시고 도우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필요를 아시고 필요를 공급해 주셨습니다.
우리의 삶의 환경이 때로는 광야와 같고, 또는 바다에서 풍랑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각박한 광야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친히 우리를 먹여 주셨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먹여 주셨습니다. 코빗 기간동안,
우리는 예배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 영생의 말씀이 여기 있는데 어디 가겠습니까? 하면서 믿음을 지켰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풍랑을 만난 바다에 처할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때에도 예수님은 물 위를 걸어서 우리에게 찾아와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두 이야기를 묶어 놓은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풍랑을 만나 어찌할 바를 몰라, 기도조차 할 수 없을 때에도,
예수님은 우리를 절대로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찾아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입니다.
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만을 온전히 신뢰하십시다. 표적만을 바라보지 말고, 그 표적이 가리키는 예수님만을 바라보십시다. 풍랑의 현실도, 믿음으로 지나 가십시다. 반드시,
우리에 찾아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기쁨을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기록된 것처럼, 우리의 배는 곧 저편에 도착해 있을 것입니다.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요6:21)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매우 가까이에 계십니다. 우리의 사정과 형편을 아시고 계십니다. 그 분이 말씀하시는,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시는 음성을
들으며, 믿음으로 우리의 어려움을 극복하십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도와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