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18일
주일
성경:
에베소서 2:11-22
설교:
하나님의 거대한 비젼
바울사도는 예수 안에서 인류에 대한 거대한 비젼을 보았습니다. 인간을 갈라놓는 막힌 담이 무너지고 새로운 인류가 태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에베소서 2:14)
얼마나 아름답고 거대한 그림입니까?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담이 무너지는 그림 말입니다. 둘이 하나가 되는 그림. 너와 내가 우리가 되었습니다.
나와 그들이라는 이미지가 사라지고 우리라는
이미지가 주어졌습니다. 당신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비젼을 벌써 이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11:6-9)
그 거룩한 산에는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인류가 평화와 조화 속에 살아가는 것, 그것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비젼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하나님의 위대한 비젼을 시작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갈라진 세상을 보셨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갈라져 있었고, 여자와 남자가 갈라져 있었고, 종과 자유자가 갈라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갈라진 세상에서 새로운 인류를 만드시기 원하셨습니다.
이런 비젼을 바울 사도는 정확히 보셨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라디아서 3:28)
얼마나 바울 사도의 통찰력이 예리하였는가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살아계실 때 예수님을 만나지도 못하셨지만 그 분이 하시고자 하는 것을 정확히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류를 갈라놓는 담이 아니라, 우리를 연결하여 주는 다리가 된 것입니다. 그것을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자기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유언 기도를 보면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볼
수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모두가 다 하나 되는 것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요한복음 17:20-23)
처음부터 하나님의 비젼은 모든 인류를 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해서 그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여 그들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축복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축복이 이스라엘로부터 흘러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막는 담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담을 허물고 축복이 흘러가게 하시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을 하기 위해, 예수님은 율법 마저 폐하셨다고 바울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에베소서 2:15)
유대인으로써 이것은 매우 하기 어려운 말이었습니다. 아주 극단적인 표현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율법은 그들의 전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율법을 폐하셨다는 것은 매우 radical 한 표현이었습니다.
바울사도는 이 계명이 새 사람을 만드는데, 새 인류를
만드는데 걸림돌이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계명들을 모아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마치 black hole 처럼
한 계명이 모든 다른 계명들을 빨아 들였습니다.
그것이 무슨 계명입니까? 사랑. 예수님은 모든
계명들을 폐하셨고 하나만 남기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이었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이 이 계명들을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계명이 우리를 갈라 놓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 인류를 조각 조각 갈라 놓는 그 담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Hostility 입니다. 한국 성경에는 원수된 것으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즉, 적대심입니다. 14절을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Hostility)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에베소서 2:14)
우리 속에 있는 이 적대심,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계명도 이 적대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셨습니다. 좋은 행동을 한다고 우리 속에 있는 적대심을 없앨 수 있습니까? 겉으로 계명을 잘 지킨다고 우리 속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적대심을 뽑아낼 수
있습니까?
이 적대심이 바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인간의 적대심은 그 극치를 나타냈습니다.
그의 얼굴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사랑을 선포하셨는데 그들은 적대심으로 예수님을 대하였습니다. 적대심은 우리 속에 존재하는 악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인류를 갈라놓는 것입니다. 인간 사이를 갈라놓고 하나님과 갈라놓는 담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예수님께서
그 적대심을 못 박았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에베소서 2:16)
적대심은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큰 악입니다. 이 적대심은 평화를 파괴합니다. 예수님은 화해를
가져오시기 원하셨습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화해를 가져오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적대심을 우리 속에서 뽑아내심으로 말미암아 이
화해가 가능하도록 하셨습니다. 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적대심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적대심이 남아 있다면 구원은 가능치 않습니다. 우리 속에 이 적대심이 남아 있을 때, 하나님과 화해를 할 수 없고 다른 사람들과 화해를 할 수 없습니다. 적대심이 가장 큰 갈라놓는 담입니다. 이 담은 무너져야만
합니다. 크리스챤이 된다고 하는 것은 그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챤이 된다고 하는 것은 이 적대심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입니다. 크리스챤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제 더이상 다른 사람들을 이 적대심을 갖고 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적대심이 사라질 때, 우리는 변합니다. 다른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화가 날때가 있습니다.
특히 불의가 우리에게 행하여졌던가 아니면 연약한
사람들에게 행해졌을 때, 우리는 화가 납니다. 예수님도 화를 내실 때가 있으셨습니다. 그의 분노는
거룩한 분노이고 의로운 분노였습니다.
그러나 적대심은 이런 분노와는 다릅니다. 적대심은 다른 사람들을 무너뜨려야 하는 적으로 보는 것이고 없애야 하는 위협으로
보는 것입니다.
적대심이 바로 우리를 갉아 먹습니다. 좋은 삶을
망가뜨립니다. 행복을 앗아갑니다. 우리의 관계를 흔들어 놓습니다. 이 바이러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폭력,
abuse, 미움을 조장합니다. 이 세계를 망가뜨리고 파괴하는 가장 위험한 악입니다.
적대심
- 이 세상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문제입니다. 개인적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큰 문제가 되는 악입니다. 사람들은 참을성을 잃게 되었고 Intolerant,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 속에 이 적대심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행동이나 말로 상처를 주고 해를 가합니다.
지난 주일,
영국이 이탤리에게 Euro Cup을 뺏겼습니다. 게임에 졌다는 것이 수치가 아니라, 팬들이 한
행동이 수치였습니다. 영국 경찰은 페널티 킥을 집어 넣지 못한 세명의 젊은 흑인 선수들에게
말할 수 없는 인종차별의 발언을 한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Rashford라고 하는 흑인 선수도 그 중에 하나였는데, Rashford는 아이들 Poverty를 퇴치하는 운동을 앞장서서 했던 사람이고 이 판데믹 동안에 영국 정부를 움직여서
수 많은 가난한 어린 아이들에게 점심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사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적대심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시한 폭탄을 안고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릅니다.
적대심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 적대심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가장 Obvious 하게 나타나는 것이 분노이겠지요. 그러나 분노 뿐만이 아니라 여러 다른 모양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차별주의,
Passive aggressive, 아주 조용한
것 같지만 속에는 무시 무시한 공격적인 태도가 있는 모습,
복수심, 심지어 자기 의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적대심
- 이것이 바로 우리를 갈라놓는 것입니다. 인류를 죽이는 독입니다. 우리의 관계를 망가뜨리는 독입니다. 이 적대심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두 다 참 다릅니다.
그리고 그 다른 것은 괜찮습니다. 우리의 다른 점은 우리가 Celebrate 할 일이지, 내려보고,
깔보고, 미워할 일이 아닙니다. Ella Fitzgerald and Louis Armstrong이 같이 노래한 아주 아름다운 노래가 있습니다. You say Tomato, I say Tomahto. You
say Potato, I say Potahto. What’s the matter? 그 노래의 마지막에 “we need each other.”
맞습니다.
우리는 서로 필요합니다. 서로를 적대심을 가지고 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우리의 친구들입니다.
인내하시고 서로 용납하십시오. 서로를 부드럽게 대하십시오.
우리는 모두 다른 배경에서 자라 왔습니다. 우리가 자라온
환경이 다 다릅니다. 우리가 자라온 가정, 다 다릅니다.
우리의 경험도 다릅니다. 문화도 다릅니다. 나에게 중요한 것이 당신에게는 중요하지 않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다 다른데 이 다른 점이 우리가 서로 미워하고 갈라져야 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다른 점이 우리를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이 다른 점을 받아들이고 존중하지
못하는 우리의 적대심이 바로 우리를 갈라놓는 것입니다.
우리의 다른 점이 우리를 갈라놓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우리를 갈라놓습니다.
참, 인간이 서로의 다른점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는 관대하지 못합니다. 잘못된 우월의식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다른 말로 겸손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쉽게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적대심을 갖고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평화와 조화 속에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속에 있는 적대심을
다룹시다. 예수님께서 우리 속에 있는 적대심을 다룰 수 있도록 우리에게 사랑을
주셨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말하기는 쉬워도 그것을 실천하기는 어렵지요. 압니다.
그래도 우리는 그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이라고 하는 가장 큰 선물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 속에는 적대심이 자리 잡을 자리가 없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우리의 적대심이 우리를 주장하게 하지 마시고, 사랑이 우리를 인도하게끔 하십시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적대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우리는 평화와 조화 속에 살면서 일치를 가져오라고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적대심은 우리를 갈라놓지만 사랑은 우리를 하나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