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13일 주일
성경: 마가복음 4:26-34
설교: 심고 기다리자
예수님께서 아주 귀한 비유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마가복음 4:26, 27)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 이 구절이 제 마음에 깊이 와 닿습니다. 이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감동으로 와 닿습니다.
내가 모든 것을 알 필요가 없다는 것이고 내가 결과를 주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준비를 철저히 하지 않고 그저 좋은 결과만을 바라는 그런 게으름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우리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주장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좋은 삶을 살기 원하고, 그 좋은 삶이 하나님의 나라를 반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나는 것은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그분의 나라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열쇠는 하나님이 갖고 계시지 우리가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고린도전서 3:6, 7)
예수님은 삶을 바로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그의 삶을 통하여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을 홀로 하시지 않았습니다. 항상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역사하게끔 하셨습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분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그 끝의 모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끝을 어떻게 가져오실지 우리는 모릅니다.
이 진리가 우리의 삶에 대해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삶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저는 이 진리가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자신감을 준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하죠. 그러나 때로는 우리의 최선도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결과가 보이지도 않고 그 결과가 보이지 아니할 때, 우리는 좌절하기도 하고 또한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소망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실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좋은 삶이 이루어지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깨진 그릇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깨진 그릇을 통하여 좋은 삶을 가져오실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좋은 그릇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보물을 우리에게 담아두신 것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7)
그가 그리스도를 만날 때까지 그는 자기가 깨진 그릇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위대한 일을 함으로 하나님의 위대함과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진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가 부활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것에 대해 더 명확하게 말씀하시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는 것이 우리가 선하고 훌륭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고린도전서 15:42-
44)
예수님은 이 진리를 오늘 읽은 두번째 비유에서 더 명확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마가복음 4:31, 32)
겨자씨는 세상의 모든 씨중에 가장 작은 씨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땅에 심기워 자라날 때, 모든 풀보다 큰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가장 작은 씨가 공중의 새가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되는지 알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종종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 때 가장 작은 씨로 볼 때가 있습니다. 초라한 우리의 모습을 봅니다. 내가 뭔데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가장 작은 씨 속에 가장 큰 나무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씨앗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씨앗을 예로 들어 비유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가장 작은 씨만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두려움의 눈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에 다윗왕을 묵상할 때 저희가 살펴 보았습니다. 다윗은 한갓 양치는 소년에 불과하였지만 그 거대한 골리앗을 무너뜨릴 자신이 그의 속에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두려움의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우리는 두개의 끔찍한 사건을 들었습니다. 하나는 원주민 Residential School에서 215개의 어린 아이들의 유골을 발견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원주민에게 일어난 끔찍한 악의 역사를 다시 한번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까지 그들의 아픔을 호소하였지만 사람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상상을 해 보십시오. 여러분의 어린 자녀를 강제로 여러분의 품에서 떼어간 후에 다시는 그 아이들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상상해 보십시오.
또 다른 이야기는 런던에서 일어난 큰 사건이었습니다. 저녁에 길에 산책을 나와 걷던 온 가족이 9살난 남자 아이를 제외하고 다 차에 치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단순히 그들이 모슬렘이라는 이유 때문에 20살 먹은 백인이 트럭으로 그들을 깔아 죽였던 것입니다.
이 두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왜 라는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내 손주들을 생각해 보았고 내 가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라는 질문을 던졌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의 무능력함을 깨달을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그저 우리의 현실의 하나로 받아 들이고 그저 넘어가려고 하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인간의 선함에 대해 절대로 소망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난 후에 good 이라고 하신 인간입니다. 우리는 이 선함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함을 깨닫지만 소망을 잃지는 않습니다.
We are helpless but we are not hopeless.
얼마 전에 뇌암으로 사망을 한 유명한 그룹의 리드 싱어인 Gord
Downie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은 원주민 Residential school에서 도망쳐 나온 아이의 이야기에 감동을 받고 그의 마지막 album인 Secret Path를 출판했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은 Chanie Wenjack이고 12 살에 Residential School을 도망쳐 나와 600Km 떨어진 집을 찾아 오다가 죽었습니다. Gord Downie는 100 million 달러를 모금하는 것을 목표로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Gord Downie는 자기는 죽어가면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비유는 우리에게 포기하지 말라는 교훈을 주십니다. 씨가 어떻게 자란다는 것을 모른다는 이유로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그저 가장 작은 씨만 보인다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변화를 가져오는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결과를 모른다 하더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씨를 뿌려야 합니다. 우리는 온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하더라도 계속해서 좋은 씨를 뿌릴 것입니다. 심고 기다릴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무궁화 양로원 모금을 했던 취지였습니다.
우리는 권력이 타락하고 절대적인 권력은 절대적으로 타락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또한 힘이 없다고 느끼는
Powerlessness도 또 타락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Canadian 작가인, Mary Jo Leddy가 한 말이었습니다.
“우리는 권력의 유혹을 받고 그 권력은 우리의 모든 것,
우리의 가정, 우리의 신앙 생활, 우리의 삶을 타락시킨다. 그런데 우리는 또한 무능력함의 유혹을 받기도 하고 그것이 우리를 타락시킨다는 놀라운 사실을 꼭 기억해야만 한다.” (Mary Jo Leddy)
우리가 무능력함을 느끼는 것이 때로는 선한 삶을 사는 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변명이 될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리 자신의 무능력함을 느낍니다.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가진 것이 없는데, 잘 하는게 없는데, 거룩하지도 않은데, 신앙도 없는데 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갑니다. 우리 손이 묶여 있는 것을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을 보면 나는 너무 작고, 초라하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변명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심는 씨앗을 통해 역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씨앗을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것을 하실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씨를 뿌리지 않는다면, 하나님 마저도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
두번째 비유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마가복음 4:31, 32)
믿음은 우리 눈으로 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브리서 11:1)
우리가 씨를 심을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성장케 하실 것을 믿고 심읍시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소망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씨를 심고 기다리십시다. 그러나 이 기다림은 그저 허송세월을 보내는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는 소망을 갖고 기다립니다. 계속 씨를 뿌리며 심고 기다립니다.
이 소망을 갖고 기다리는 것, 믿음을 갖고 기다리는 것,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의 악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우리의 저항입니다. 계속해서 우리의 씨앗을 뿌리겠다는 우리의 결단입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들을 미워하며 그 미움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가 살아야 할 길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랑, 평화, 조화, 그리고 이해의 씨앗을 뿌릴 것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면 우리는 기다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포기할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과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씨를 심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때로는 아무런 힘이 없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 소망이 우리에게 있고, 그 소망이 우리를 살릴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망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