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 설교 (2021년 4월 11일)
“사귐의 하나님”
수도사이며 문필가인 토마스 머튼은, 많은 책을 썼지만,
그 중에 이런 타이틀의 책이 있습니다. No Man is an Island. 어떤
누구도 외딴 섬은 아니다 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 인간은
공동체가 필요하며, 관계가 필요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이 책의 내용은,
영적인 묵상들을 모은 것인데, 그가 거기서 한 말 중에 “관계”와 관련한 말로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Love can be
kept only by being given away. 사랑은 줄 때만 지킬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계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우리 표현에 독불장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누구도 홀로 무언가를 이룰 수 없다 라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며, “상생”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어제 토요일 아침에, 구역장 정기 모임이 Zoom 으로 있었습니다. 올해부터 매월 두번째 토요일에 만나서, 교우들을 돌보는 일을 정기화 했습니다. 올초에는, 주로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지 파악하고, 필요한 것들을 지원하고자 했습니다. Zoom 으로든지, YouTube 으로든지, 같은 시간에 온 교회가
하나되어 예배드리는 것을 새해부터 하나의 운동으로 삼았습니다. 코빗과 함께 찾아온, 춥고 어둔 겨울을 극복하고 견뎌낼 수 있었던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예배 공동체를 통해서였음을
깨달으면서, 우리 모두는 감사함을 나누었습니다. 어제는,
특별히 각 구역별로 구역원들 상황을 듣고, 기도가 필요한 교우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도의 교제”
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영어로는 Fellowship of
the saints 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이 Fellowship 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해가 제한되어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친교실이 있어서, 영어로는 fellowship hall 이라고 하지만, 교회 공동체에서의 fellowship 의 의미는 더 깊은 의미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저, 가까운 사람끼리 만나서 얘기하고 시간을 보내는 정도가 fellowship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사귐이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오고 있습니다.
3절에,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6절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7절에,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라고 하고 있습니다. 영어 성경은, 이 사귐을 fellowship 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원어로는 koinonia 라고 합니다. 많이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koinonia 의
뜻은, partnership, communion, fellowship 등이 있습니다. 협력자, 영적인 교섭, 교제 등이라는 뜻입니다.
단지, 커피와 차를 마시거나, 놀이를 같이
하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Fellowship 은, 오락의 의미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동반자로서 마음과 힘을 모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복음을 위하여 재정적인 나눔과 분담을 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로부터 헌금을 받아서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가난한 자들에게 전달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고린도후서 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직무로 증거를 삼아 너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고 복종하는 것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섬기는 너희의
후한 연보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고후 9:13)
여기서 언급한 연보가 바로 koinonia 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귐도, 그저, 친교와 오락을
위한 것이 아님을 더욱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사도요한은, 그의 공동체에게,
복음을 나누는 그런 사귐,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그런 koinonia
를 원하고 있으며, 그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큰 기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귐은,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신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성육신의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문인 요한일서 1장은, 요한복음 1장과 매우 유사합니다. 나중에 한번 서로를 비교하면서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 1:14)
오늘 본문 1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셨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 자체가, 사귐의 시작이고, 사귐의 증거입니다. 죄많은 인간들과
교제하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오신 성자 하나님이야말로
사귐의 결정체 입니다.
Koinonia 에서 koine
라는 그리스어가 나왔는데, 이 말의 뜻은 common 입니다. 평민, 대중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공유하고 공감한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koine
Greek 하면, 고급어인 라틴어 말고, 대중들이
사용했던 평민 그리스어를 뜻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와 사귐을 가지시려고, 하늘 보좌를 버리고, 우리처럼 되신 것이나, 평민이 되신
것이, 진정한 koinonia 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사귐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수년전에 로마서를 교회에서 공부할 때에 들었던 표현이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진흙탕에 뛰어 드셨다 라고요.
바울은, 이런 사귐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이것이 사귐의 근본 정신이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내신 사귐입니다.
이런 사귐으로 우리가 서로를 대할 때에, 우리 가운데 진정한 공동체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영적이고, 복음에 입각한 공동체 말입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손수 보여주셨던 사귐을, 우리
모두가 감당하니, 우리의 모임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동체를 이루면서 살아갈 때에, 서로가 서로에게 가져야 하는 어떤 특정한
태도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것은 용서입니다.
공동체를 이루었지만, 공동체를 위해서 끊임없이 돌보고, 세워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공동체는 조직이 아니라 유기체 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9절)
“죄를 사하시며” 가 바로 용서 입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이 먼저 시작하신 것이고, 지금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만일” 이라고 시작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이미 일흔번의 일곱번 까지도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 자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믿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것들을 가지고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빛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인너보이스의 묵상의
내용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서도,
용서하고 용서를 구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빛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옳고 그름보다, 맞고 틀리는 것보다 더 큰 것을 보고, 그것을 위해서, 용서하고 또한 용서를 구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이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존재와 생각이 열리기 때문입니다.
올해 우리 교회 표어가 Open Wide 입니다. 그렇게 활짝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정죄하고 판단하는 마음이, 깨지고 열려서, 이해하고 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열림 가운데,
그리고 그 깨진 틈으로 하나님의 빛이 임하시고, 치유과 회복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한 사람이나, 용서를 구한 사람 모두에게 말입니다. 결국, 하나님만이 드러나고, 높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번에, 낙스 아시안 센터에서는, 재 캐나다 일본인들의 이민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 여인은 브리티시 콜롬비아의 한 캠프에서
태어난 2세인데 43년생입니다. 늘 부모님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가, 너는 절대로 일본인이나 동양인의 모습을 드러내지 말고,
이 사회에서 칭찬받을 수 있도록 매사에 열심히 살고, 공부도 잘하고,
영어도 잘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45세가 되는 해에, 이민 1세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녀는 인생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숨죽이고, 전쟁에서 패한 민족으로 수치심을 가지고 살았는데,
사실, 캐나다 정부에서 그들에게 저지른 비인간적인 행위들로 인하여 말할 수 없는
상처들을 안고 살아왔는데, 이처럼 불행하게 살아왔던 자기 자신의 삶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가 하기 시작한 것은, 자기에게
상처를 준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용서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자기의 삶을 제대로 살아가고자 그렇게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용서는 치유의 시작이며,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테루미 오이까와 입니다.
헨리 나우엔도, 공동체에 필요한 discipline 즉 영적인 훈련이 두 가지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Celebration
and Forgiveness 입니다. 그 중에서도 용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Forgiveness is to allow the other person not to be God. 용서는,
상대방이 하나님이 되지 않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라고요. 쌍방 모두,
하나님 노릇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용서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정신이며 태도입니다. 이 말은 결국, 하나님만이 빛이시며, 우리는 모두 그
빛의 아름다운 역사의 수혜자들 뿐이다 라는 것입니다.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 하나를 소개합니다. 17세기,
프랑스 변두리에 위치한 어느 문제가 많은 수도원에 한 늙은 수도사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새 수도사가 왔다는 소문에 수도사들이 밖으로 몰려 들며 백발이 성성한 老수도사를 보고 숨
돌릴 여유도 주지 않고 말했습니다. “老수도사가 왔구려! 어서 식당에 가서 접시나 닦으시오.” 이 수도원에서는 처음 부임한 수도사에게 그런
허드렛일을 시키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백발의 老수도사는 머리를 숙이며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답하고는 식당으로 갔습니다. 노수도사는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한 달,
또 한 달, 그리고 또 한 달을 접시만 닦았습니다.
선배 수도사들은 말없이 그리고
불평하지 않고 일하는 老수도사를 얕잡아 보고는 그에게 멸시와 천대와 구박을 쉬지 않았습니다. 석 달이 지날 즈음에 수도원 감독자가 이 수도원을 방문하였습니다.
젊은 수도사들은 책잡힐 일이
있지나 않을까 두려워하며 감독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는데 감독은 수도원의 원장을 찾았습니다. “원장님은 어디 가셨는가?” “원장님은 아직 부임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대답하자, 감독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아니 무슨 소린가? 내가 로렌스 수도사를 이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하였고 또 이곳으로 파견한지 벌써 3개월이나
되었는데?” 이 말을 듣고는 수도사들이
아연실색하여 모두 식당으로 달려갔습니다. 그 곳에서 백발의 노 수도사는 여전히 식기를 닦고 있었습니다.
그 노 수도사가 바로 브라더 로렌스(Brother Lawrence)이었습니다.
그는 The 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 이라는 책을 쓴 사람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고 공동체를 위하여 사귐의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용납하고 관용한 가운데,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으셨고,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그 수도원은 프랑스 지역에서 가장 모범적인 수도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진정한 사귐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서로를 용서하고, 또한 용서를 구하는, 진정한 koinonia 를 이룰
때에, 하나님의 빛이 이 공동체 위에 비추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존재에
하나님의 밝고 따뜻한 빛이 임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그 빛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무궁화 양로원 인수를 위하여 모금하는 것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사귐이,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한 곳에 흘러 넘치는 역사가 되길 바랍니다. 그 곳에 치유와 회복을 가져다
주길 바랍니다. 양로원을 통해서, 그들의 이름들이 불려지며,
그들의 이야기들이 기억되길 바랍니다. 이 교회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위한 당신의
빛으로 사용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