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21일
주일
성경:
요한복음 12:20-33
설교:
고통이 우리를 섬기게 하라
고통은 내가 선택하고 선택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고통은 삶의 한 부분이지요.
살다 보면 다 고통을 경험하게 됩니다. 고통이 없는 삶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고통 하면 꼭 어떤 극적인 고통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매일 매일 살아가면서, 우리가 겪는 것들을 말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
우리를 실망시키는 것들
우리를 분노케 하는 일들
걱정, 근심, 몸의 질병
자신에 대한 부족함,
죄책감, 관계의 어려움
이 모든 것들이 다 삶의 고통의 모습입니다. 고통은 피하려고 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을 닫아 잠가 버린다고 찾아오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 때나,
우리가 준비 되어 있던 없던, 초대도 받지 않았는데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고통은 우리를 연약하게 만들지요. 고통을 받을
때,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가 하는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의심이 가기도 하지요. 또 고통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사람들과 거리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멀리 하기도 합니다. 고통은 우리를 외롭게 만듭니다. 아주 심한 고통을 받을 때, 우리는 버림 받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외쳤던 그 외침은 그의 극심한 고통을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것은 내가 아프다
라고 말하는 것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을 받을 때 우리는 자신의 초라함을 보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작아지는 경험을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장 초라하게 만듦으로 그에게 고통을 주려고 하였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조롱하였습니다. 그에게 가짜 왕관을 가시로 만들어 씌우고, 자색 가운을 입히고, 왕이여 하며 절하면서 그를 놀려 댔습니다. 그러다가 그의
뺨을 치고, 그에게 침을 뱉으며, 그를 주먹으로 때렸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하찮은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고통이 바로 그것을 합니다. 고통은 우리를 하찮은 존재로 느끼게 합니다. 우리 자신의 고귀함을 잃게 됩니다. 자신을 잃게
됩니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처럼 느끼게 합니다.
고통이 우리를 짓누르고,
짓밟고, 마음대로 좌지우지하게 내버려 두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잃게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도 잃고, 자신의 정체도 잃고,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그때
바로 고통이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고통이 이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두려워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고통이 두려우니 그것을 피해 다닐 것입니다. 고통을 보면 벌벌 떨게 될 것입니다.
고통이 우리 삶의 한 부분이지만 고통에 짓눌려 사는 것, 고통이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주장하게 하는 것은 또 다른 모습입니다. 꼭 그렇게 살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을 이기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고통을 이기는 힘을 주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통에 이리 저리 끌려 다니시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이 그의 삶을 주장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을 이기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한복음 16:33)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는 말은 내가 고통을 이겼다는 말입니다. 그는 고통을 이기셨습니다.
고통을 이긴다는 것은 더이상 그에게 고통이
없게 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고통이 있었지만 고통이 그를 지배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고통이 있었지만 고통의 악영향이 예수에게 미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고통이 지배하지 못하는 존재, 고통이 지배하지 못하는 인생,
고통이 지배하지 못하는 우리, 그것이 바로 강한 존재이고, 강한 인생,
강한 사람입니다.
고통은 우리 모두에게 임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통이 나를 지배하느냐 아니면 내가 그 고통을 이기고 그 고통으로 우리를 섬기게 하느냐 하는 것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준비를 해야 합니다. 삶의 어떤 상황에도 이겨나갈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면 우리는 고통의 순간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도 많은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의 고백을
들어 보면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3-27)
그러나 고통이 그를 주장하지 못했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그의 고백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린도후서 4:8-9)
사방으로 문제가 밀어 닥쳐 그를 괴롭게 하였지만 그는 그 문제에 싸이지 않았습니다. 답답한 일들을 경험하였지만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고통이 있었지만 그는 고통을 이겼습니다.
고통은 피할 수 없지만 이겨야 합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고통이 무서워 피해 다니면 다닐수록 그 고통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그 고통이 우리를 지배하게 내버려 두면 우리는 인생을 잃게 됩니다. 더이상 의미 있는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인생을 두려움 속에서 살게 되고, 인생이 어두워지며,
필요 이상으로 고통이 우리의 모든 생각을 주장하게
됩니다. 거기에 무슨 의미 있는 인생이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힘은 고통을 이기는 힘입니다. 고통이 우리를 주장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이
우리를 섬기게 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과 바울은 고통을 어느 누구 보다도 많이 받았지만 그들은 그것이
그들의 삶을 주장하게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로마서 5:3, 4)
이것이 고통에 지배 받는 삶입니까? 이것이 고통이
그의 삶을 주장하게 하는 삶입니까? 아니죠. 고통이 그를 섬기게 하는 모습입니다. 고통이 우리를
무너뜨리고 우리를 더 못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우리에게 인내를 키워주고, 끈질긴 성격을 만들게 하여 주고, 또한 소망을 일으키게 합니다.
예수님도 오늘 말씀하십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 12:24)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다는 것은 바로 죽음의 고통을 말합니다. 그 죽음의 고통 마저도 생명을 일으키는 씨앗이 된다는 것을 예수님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이 영광을 가져온다는 것을 보셨습니다. 이제까지 나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시다가 오늘 본문에서 마침내 예수님께서
나의 때가 이르렀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한복음
12:23)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할 때가 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영광의 때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고통이 궁극적으로 영광을 가져올 것을 보셨습니다. 영광과 고통,
예수님에게 그것은 한 동전의 양면과 같았습니다. 고통은 그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고통은 그에게 영광을 가져오는 것이었습니다. 고통을 완전히 극복한 모습입니다. 고통이 온전히
예수님을 섬기는 모습을 봅니다. 고통 마저도 그에게 유익함을 가져 왔습니다.
고통이 우리를 찾아올 때,
너무 감정적으로 대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할 때, 우울해 지거나,
그 우울함이 오래가면 분노가 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바로 고통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반응할 때, 우리는 고통에 목덜미를 잡히게 됩니다. 그때부터 고통이
우리를 주장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고통은 어렵습니다. 오늘 예수님도 이렇게 고백하시지 않았습니까?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요한복음 12:27)
그러나 바로 이어서 그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요한복음
12: 27)
고통 때문에 도망하시는 모습이 아니라, 자기의 처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예수님의 용기를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납니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고통을 직면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고통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을 살았던 것이 아니라, 고통이여 오려면 와라 하는 마음으로 사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2:28)
그 고통이 오히려 영광을 가져올 것을 보셨습니다.
여러분 고통이 여러분을 찾아올 때, 주님을 바라
보십시오. React 하지 마십시오. 고통이 여러분을 짓누를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바라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욥이 한 것입니다. 욥은 고통에 대해 누구 보다 더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기 42:5)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기도 하지만 또한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을 가장 잘 볼 수 있습니다. 고통을 받을 때,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을 가장 구체적으로 찾게 됩니다. 고통이 없을 때, 가질 수 없었던 간절함이 고통을 받을 때, 우리 속에서
일어납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이 살아 있는 부르짖음이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살아 있는 기도가 됩니다. 고통이 바로 우리 안에 말할 수 없는 간절함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주님을 향한 뜨거움이 되살아 납니다.
그 고통이 우리를 변화 시킵니다. 우리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힘을 잃게 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힘을 잃게 되고, 오히려 우리를 섬기기 시작합니다. 우리를 강하게 하고,
우리의 존재를 더 탄탄하게 하고, 우리 안에 소망을 만들어 냅니다. 소망이 싹트는 토양이 바로 고통입니다. 편할 때 만들어낼
수 없었던 소망을 고통이 만들어 냅니다.
그 소망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는 소망이고, 그 소망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고통 자체가
우리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을 보는 우리의 자세에 따라 고통이 오히려 우리를 섬기고 우리를
더 깊은 신앙의 자리로 인도합니다. 폭풍 가운데서도 고요함을 찾으십시오. 잠잠한 가운데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은 날아오르실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