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8일
주일
성경:
창세기 17:1-7, 15-18
설교:
아브라함의 웃음
웃는다 라고 할 때에 우리는 그것을 여러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뻐서,
즐거워서, 좋은 일이 있어서, 웃을 때가 있습니다.
아니면, 어떤 상황이나 이야기가 재밌어서 웃을 때가 있습니다. 아니면 상황이 너무 어처구니 없거나 황당한 것을 경험할 때, 웃습니다.
아브라함이 오늘 웃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창세기 17:17)
아브라함의 웃음은 어떤 웃음이었을까요? 99살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니 어처구니 없어서 웃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나중에 이삭이 태어났을 때, 실제로 그 약속이 이루어졌을 때, 아브라함은 기뻐서 웃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웃음이라고
지어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이 이삭인데, 이삭이라는 이름의 뜻은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이 웃음이라고 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삶에는 하나의 큰 주제 였습니다.
이삭은 온전히 약속의 아들이었습니다. 자기가 계획해서
난 아들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의 아들의 이름을 웃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약속은 웃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에게 웃음을 가져옵니다. 아브라함은 좋기는 너무 좋은데 믿기지 않아 웃었던 것입니다.
18절을 보면 참 재미 있습니다.
하나님이 99세 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하니 아브라함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창세기 17:18)
농담하지 마세요,
하나님. 저 스물 아홉이 아니라 아흔 아홉입니다. 100 살 먹은 사람이 94살 먹은 여왕에게 knighthood, 나이트 작위, 기사신분을 받았다면 모를까, 99살에 무슨 아이입니까? 뉴스 보셨습니까? 100살 먹은
Tom Moore 라고 하는 사람이 94살 먹은
여왕에게 기사의 신분을 받았습니다. So cute. 1000 파운드를
모금하려고 하였는데 50만 파운드를 모금 했습니다. 그런데 100살 먹은 노인이 아이를 낳는다구요? 그저 이스마엘이나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는데 끝에 아브라함은 무엇을 합니까? 할례를 행합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이 날에 그 아들 이스마엘과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 중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 포피를 베었으니” (창세기 17:23)
할례는 하나님의 약속의 상징이었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창세기 17:10)
아브라함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여 웃어 넘기려고 하였던 그 약속을 받아 들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할례를 행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그저 웃어 넘기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결국,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던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브라함을 신앙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하여 유대 민족이 형성이 되었고,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형성이 되었고, 또한 굵직한
세계 종교인,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뿌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처음으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해에서,
별에서, 나무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려고 하였지만 아브라함은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를 하나님의 친구라고 하였습니다.
이 인격적인 만남의 가장 독특한 성격이 바로 약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은 약속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삶은 약속으로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고향 땅을 떠나 약속된 땅으로 갔던 것도 이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창세기
12:1-3)
이 약속 때문에 그는 자기의 터전을 옮겼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 약속은 그저 빈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좋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인생을 움직여 나가는 힘이었고, 그의 인생을 shape 하는 힘이었습니다. 그는 약속을 믿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창세기 17:4-6)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으로 우리의 삶을 이끌어 나간다는 놀라운 진리를 아브라함은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figure out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그 약속을 우리의 삶에서 이루신다는 것을 아브라함은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움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약속을 주셨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마지막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20)
예수님께서 우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약속을 붙잡아야 합니다. 때로는 이 말씀이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삶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외롭고,
힘들기 때문에… 그러나 그 때에도 그 약속을 붙잡고 사는 삶이 바로 믿음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약속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우리의 머리로 다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이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역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해가 되지 않고 불가능해
보이고, 말이 안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믿고 받아 들일 때,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세계를 발견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그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약속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삶을
뒤돌아볼 때, 우리는 그것을 벌써 경험하였습니다. 삶이 너무나 어려워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전혀 느끼지 못할 때가 있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지켜 주셨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한복음 11:25,
26)
이것이 예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시고 나사로의 무덤 앞으로 가서 돌을 옮겨
놓으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요한복음 11:39-40)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의
약속을 들었지만 믿기가 어려웠습니다.
말이 안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마르다는 이제 너무 늦었다는 것을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 한 것처럼,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라는대로 돌을 옮겨 놓도록
하였습니다. 그때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약속의 사람들입니다.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서 약속을 주셨고, 그 약속을 믿고 사는 사람들로 만드셨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모두 축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이제
그 약속을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도 그 약속을 믿지 못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보다는 그들은 눈에 보이는 증거를 찾았습니다.
James Edwards 교수는 이렇게 말합니다.
“Faith that depends on proof is not faith, but only
veiled doubt.”
약속은 눈에 보이는 증거가 아닙니다. 눈에 보이는 증거라면 그것은 약속이 아니지요. 아직 약속이 현실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 여기에 오지 않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갈등했던 것입니다.
약속과 성취 사이에는 늘 간격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간격 사이에서 갈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간격을 메꿀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가만히 보면 그는 약속과 성취 사이에서 그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갈등했던 것은 바로 믿음의 갈등이었습니다.
물론, 그도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다 이해하고, 쉽게 받아들였던 것은 아닙니다. 두려워서 자기의 아내를 자기의 누이 동생이라고 속이다가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도 이 믿음을 놓고 씨름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이삭까지 바치려고 하는 믿음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약속이 아직 거기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마치 벌써 도착한 것처럼 받아들이며 살았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내가 갖고 싶다고 쉽게 내 의지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는
과정이 있습니다. 믿음은 삶의 여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믿음은 우리 속에서 조금씩 자랍니다. 믿음을 갖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갈등이 있습니다.
귀한 갈등입니다. 그 갈등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점점 자라나게 됩니다.
그 갈등은 예수님도 가지셨습니다. 겟세마네의 갈등이 바로 예수님의 갈등이셨습니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갈등이 없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우리는 늘 갈등을 합니다.
그것은 신앙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갈등이 없다는 것이 신앙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약속을 믿으려 하기 때문에 갈등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너무나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현실과 동 떨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갈등이 사라질 때가 없는 것입니다.
그 갈등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갈등을 피해 도망가지 마십시오. 갈등을 끌어 안으십시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약속을 붙잡고 산다고 하는 것이 가장 편한 삶은 아닙니다. 약속이 우리 손 안에 있어서 우리가 마음대로 주장하고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약속은 항상 여러분 보다 더 높은 곳에 있습니다. 약속은
여러분보다 더 큽니다. 그래서 약속이 우리에게 올 때에, 우리는 웃음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에 웃음으로 단을 거둘 때가 올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시편 126:2)
여러분의 어처구니 없는 웃음이 기쁨의 웃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수 많은 하나님의 약속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 약속들이 여러분들의 약속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저 성경 속에 있는 빈 말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붙잡고 삶을 살아가는 그런 약속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약속은 여러분 세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약속은 여러분의 후손에게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약속을 믿는다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이 복된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