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21일
성경:
창세기 9:8-17
설교:
하나님의 아픈 마음
오늘 우리가 보는 것은 하나님의 아픔입니다. 홍수 후에 하나님의 마음은 참 아팠습니다. 아픔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픔도 없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아픈 것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안타까운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픔과 안타까움입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타까와 하십니까? 내가 하나님께 그렇게 중요합니까?
하나님은 인간의 악함을 보았습니다. 그 악함이
인류를 망치는 모습을 보며 마음 아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인데 잘못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보며 어쩔줄 모르는 하나님의 마음을 봅니다.
홍수 후에 하나님은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후회하셨습니다. “다시는” 이라는 말을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창 9:11)
“다시는 물이 모든 육체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 (창
9:15)
하나님의 후회하시는 모습이 보입니다. 창세기 기자는
하나님을 매우 인간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슬픈 마음을 회개하는 모습, 후회하는 모습으로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자식이 자기 잘못으로 잘못 되는 것을 보며 다 나의 잘못이라고 회개하는 부모의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저는 성경의 이런 표현이 우리의 하나님을 훨씬 더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에는 이런 동양적인 면이 많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보며 하나님의 속성을 분석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은 창세기 기자의 의도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아픈 마음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표현으로
나타냈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표현이 무소부재 하시고, 전지 전능하시고, 등의 표현보다 훨씬 더 가까이 와 닿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먼 곳에 홀로 있는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가까이 하시면서 우리처럼 느끼고 우리와 관계를 맺고 계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아파서 그의 마음을 바꾸셨고, 그 바뀐 마음을 선언하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언약이라고 말하였지만 하나님의 선언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양쪽이 맺은
어떤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노아에게 그저 선언한 것입니다. 어떤 조건을 준다 한들 인간이 그 조건을 이행할 수 있었겠습니까? 어떤 조건도 이행할 수 없는 인간의 악한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셨기 때문에 어떤 조건도
내 걸지 않고 다시는 물로 그들을 멸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인간을 묶어놓고
있는 인간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도
그것을 하지 못하는 인간의 모습, 유혹에 쉽게 빠져 들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합니다. 마음으로는 선한 일을 하지만 육신으로는 그 반대의 일을 하는 모습을 보셨습니다. 바울이 하나님이 보신 그 인간의 모습이 자기 속에 있다는 것을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로마서 7:25)
오늘 읽은 본문의 그 전 장을 보면 그것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봅니다.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창세기 8:21)
어려서부터 악함이라는 말은 그 악함이 인간 속에 너무 깊이 들어와 인간의 한 부분이 되어 버렸다고 하는 말입니다. 처벌이라는 것으로 이런 인간을 바꾸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결정을 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문제는 처벌로 해결하기에는 너무나 그 타락의 깊이가 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스스로 경험하였습니다. 처벌을 받을 때는 당분간 우리는 변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처벌의 두려움이 사라질 때, 우리는 옛 사람으로 다시 돌아가는 모습을 봅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아의 가족으로 새로 시작을 하였지만 인간은 또 큰 악을 저지릅니다. 바벨탑을 세우고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인간의 모습을 벌써 보셨던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그들이 악을 저지를 때마다 처벌하셨다면 인류는 살아남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바뀌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셨습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우리가 바뀌어
의로운 사람이 되어서 그 의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신 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이 하나님의 의이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보면 우리 인간의 악함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의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으로 움직입니다.
힘 있는 자는 더 가지려고 힘 없는 자들을
착취합니다. 그것이 욕심 아닙니까? 그래도 어느 정도 질서를 유지하고 살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의로와서가 아니라, 욕심이 너무 지나치면 모두가 다 망가질 수 있기 때문에 똑똑한 인간이 그것을 규율을
정하여 통제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질서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규율이 욕심에 묶여 있는 우리를 자유케 하지 못합니다.
그 욕심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경계하고, 서로 다투고, 갈등하고,
미워합니다. 자기의 욕심을 충족시키는데 하나님은 그저 귀찮은 존재일 뿐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깊이 우리 속에 박혀 있습니다. 그 욕심이 폭력을 가져 옵니다. 포도원을 소유하기를
원했던 농부들이 주인의 아들을 잡아 죽였습니다.
욕심의 결과는 폭력을 가져오고 또한 적대심을
우리 속에 심어 놓습니다. 욕심과 적대심은 같이 갑니다. 그리고 그 적대심이 우리를 갈라놓고, 또한 하나님과도 갈라 놓습니다. 그 욕심은
처벌을 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더 강하게 불 같이 일어납니다. 노아의 홍수 후에 인간의 욕심은 더 극치를 이루어 그들은 바벨탑을 만드는 지경까지 갔습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이 뭐라 하였습니까?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자기의 이름을 내자 라고 하였습니다. 욕심은 상대방을 잡아 먹어야 하는 적으로 보게 합니다. 하나님 마저도 말입니다.
적대심이 그것의 극치를 보여 준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적대심이 점점 깊어져 결국에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하나님을 죽였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니 어두움이 참지를 못했던 것이지요. 잘 숨겨져 있던 인간의 적대심이 온전히 드러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인간의 적대심을 끝내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에베소서 2:16)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 뜻이 오늘의
본문에 숨겨져 있고, 하나님은 노아를 통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인류를 대하였습니다. 그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 보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영어로는
Bow를 구름 속에 두었다고 말합니다.
“I have set my bow in the clouds” (창세기 9:13)
여기서 이
Bow 라는 말은 활이라는 말입니다. 신이 활과 화살로 무장해 있는 그림을 많이 봅니다. 그런데 오늘의 이야기에서 보는 활은 화살이 없는 활입니다. 또한 활을 구름에 걸어 놓았다고 합니다. 화살이 없고, 활을 걸어 놓았다는 말은 싸움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을 보고 우리를 공격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을 보고 그것을 품는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활을 내려놓은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더이상 활은 전쟁의 상징이 아닌, 하나님의 언약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잘못을 보고,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수치를 보면서
우리를 적대시 하시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우리를 품으시기로 하나님은 작정하셨습니다. 우리가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평화를 시작하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을 바꾼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욕심으로 말미암아 인간 속에 스며든 이 적대심을 다루기 위해 마음을 바꾸신 것입니다. 적대심은 적대심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활을 내려 놓으신 것입니다. 이 욕심과 적대심은 처벌로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아니면 율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사랑과 희생만이 인간을 주장하고 있는 적대심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벌로가 아니라 희생과 사랑으로 우리를 다루시는 새로운 하나님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신이 자기가 갖고 있는 힘으로 주장하고,
자기의 힘에 굴복하게 하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 신 앞에 인간들은 벌벌 떨며 복종하는 모습을 우리는 봅니다. 그러나 노아를 통하여 보여준 하나님은 아파하는 하나님, 우리를 위해 자기 자신의 속성을 거스를 정도로 희생하고 사랑하는 하나님 입니다. 그 하나님을 가장 잘 보여준 것이 바로 예수님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랑의 하나님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십자가였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바로 이 적대심입니다. 욕심에서 흘러 나오는 적대심입니다. 우리 속에
이 적대심이 사로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많은 상처를 받게 되고, 사회적으로
볼 때, 수 많은 Innocent 한 사람들이 희생을 당했습니다. 이 적대심이 가족을 갈라놓고,
친구를 멀리하게 하고, 공동체를 파괴하고, 이 사회를 분열시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욕심과 적대심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지만 하나님은 그를 살림으로 욕심과 적대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신 것처럼 우리도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있는 활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활을 구름 속에 걸어 놓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안에 있는 활을 걸어놔야 합니다. 공격적인 우리의 태도를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적대심이 있는 한 우리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 적대심이 있는 한 공동체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 적대심이 있는 한 이 세상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제가 작년 신년기도회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헨리 나우엔은
우리 믿는 자들이 해야 할 것은
Hostility를 Hospitality로 바꾸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런 이미지를 줍니다.
손님을 초대하는 이미지 입니다.우리가 만약 당신이 내가 믿는 것을 믿고, 내가 생각하는대로 생각하고, 내가 행동하는 대로 행동한다면 나의 손님이 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어떤 조건을 두고 아니면 댓가를 치루게
하고 사랑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라고 그는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시라고 한 것은 심지어 원수에 대하여서도 적대심을
품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신 것은, 활을 구름
속에 걸어두신 것은, 우리의 연약함과 우리의 악함을 품고 고통하시겠다는 마음의 변화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과연 우리에게는 그런 고통하겠다 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태도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하였다면 우리는 모두 버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신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마음을 바꾸시기를 하나님께서는 원하십니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보고 판단하고, 정죄하고,
처벌하는 것 보다는 그들을 품고 suffer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해야할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내 속에 적대심을 키우지 맙시다. 우리를 죽일
뿐 아니라,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죽이는 일을 만들어 놓을 것입니다.활을 내려 놓고 품는 사랑을 키웁시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신 것처럼 우리도 마음을 바꿉시다.
우리는 지난 수요일,
재의 수요일로 시작하여 사순절로 들어갔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묵상하는 절기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의 사랑을 깊이 묵상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활을 내려 놓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