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2021년 1월 10일)
마가복음 1장 4-11절
“나의 사랑하는 자여”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second wave 가 심상치 않습니다. 그저께 통계를 보니, 온타리오에 확진자 수가 4천명이
넘었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 중에 가장 큰 이유는, 년말 년시에 가족이나
친구들과 자리를 함께 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뉴스를 보니, 48 퍼센트의
사람들이, 거주지 주소가 다른 가족이나 친구들과 함께 자리를 했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지인은 다운타운 콘도에 사는데, 크리스마스 전후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지
엘리베이터가 쉴 새 없이 오르락 내리락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행동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우리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기에, 코빗으로 인한 lockdown이
시작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정신 건강에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을 또한 보게 됩니다. 물리적인 단절과 고립으로 인해서, 평소에 해 왔던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Women’s Health 라는 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어른 2500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했는데요, 70 퍼센트가 정신 건강이 나빠졌다고 합니다. 그들을 걱정하게 하고 염려하게 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고립과 외로움인데 27 퍼센트를 차지 했습니다.
그외에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은 19 퍼센트였고, 직장과 생계 등은 11 퍼센트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먼 곳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족 중에서도,
그리고 우리 교우들 중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이며, 우리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또한 나이드시고 홀로 사시는 분들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나고 있는 현상인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교우들 중에서는요, 나이드신 분들은, 대체로 잘
이겨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정말 궁금합니다. 무슨 비결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제 강점기라든지, 육이오 전쟁을 경험하였기에, 단련이
되었던 것일까요?
전쟁 이후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 낸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니면, 그들의 신앙이,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별 빛처럼, 그들을 인도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저는 둘 다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둘은 분리되어 있지 않고, 하나 라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어려움을 신앙으로 극복할 때에, 그 인생은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즐거울 때에 찬송하고, 고난 당할 때에 기도할 때에, 신앙이 개념과 원칙에 머물러 있지 않고, 실제가 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면 할 수록, 우리의 존재는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 건강도 영적인 것이 강건할 때에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의 상황도 참담한 상황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90 퍼센트의 인구를 차지한 농민과 소작인들은, 과중한 세금과 중노동으로, 노예와 같은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억압에서 구원할 메시야만이 그들의 소망이었고,
그래서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는데요, 이것이 상징하는 바가 큽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요단강을 건너서, 약속의 땅에 들어 갔듯이,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면서, 이스라엘을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고자, 요단강에서 올라
오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 갔듯이, 동일한 이름의 예수님이 이제 억압된 “또 다른 이스라엘”을 구원하고자 요단강을 건너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에, 하늘이 갈라졌습니다. 이 갈라지다를
원어로 schizo 라 하는데, 매우 거칠게 여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딱 두 군데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 나머지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에,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는데, 바로 이 찢어지다가
schizo 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공생애는 하늘이 갈라짐으로 시작하여, 휘장이 갈라짐으로 끝나고 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에, 하나님은 하늘을 찢어 여시고는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11절)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성전 휘장이 찢어졌을 때에도, 하나님의
마음이 그렇게 찢어진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하시지 않았을까요?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우리의 신앙도, 이 하나님의 사랑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우리에게 사랑받을 아무런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겸손히
신뢰하고,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 신앙의 역학입니다. 그
신앙의 중심에는, “내가 너를 사랑한다” 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의미에서, 모든 믿는 자들에게
prototypical 이 되십니다. 모범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모범이 되시고, 선생이 되시고 리더가 되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친히 몸소 보여 주셨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요,
예수님처럼 그렇게 살아가겠다는 뜻입니다.
오늘 세례를 받은 예수님은요, 십자가를 향해서 나아갈 때에, 열정적인
삶을 사셨습니다. 삶의 목적과 나아가야 하는 방향에 흔들리지 않고, 어떤 유혹과 역경에도 쓰러지지 않고, 굳건하게 공생애를 사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견고히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존재가 견고히 되는 것은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을 듣는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곳에서 이 사랑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인정 받기 위해서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판과 시선에 연연해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현상은, 일명 SNS (Social Networking
Service)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페이스북이든 뭐든, 좋아요 버튼을 많이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별로 없으면 기분이 시무룩해집니다.
MIT 교수인 Sherry Turkle 는 말하길, 현대 사람들은 어느 시대보다 더 연결이 되어 있지만, 어느 때보다도 외로와졌다고 합니다.
“People
today report feeling simultaneously more connected and lonelier
than ever before.”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기를 위해서 살면 살수록, 우리의 삶은, 더욱 더 fragile
해질 것입니다. 깨져버리기 쉽게 된다는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비난과 criticism 을 받을 것 같으면, 견디지 못하고, 풀이 죽어 버립니다. 그런 자신이 싫어서
분노합니다.
반면에, 조금만 칭찬을 받아도,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좋아하면서 감격해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존재가 fragile 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삶은, 목적이 없고,
삶의 태도도 일관성이 없게 됩니다. 바쁘게 사는 것 같지만,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게 됩니다.
그 이유는, 존재의 중심에서 들려지고, 존재를
붙잡아주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에 그런 것입니다.
헨리 나우엔은, 이러한 우리의 상태를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런 그림자도 없는 first love 인 반면에,
우리 사람들이 구걸하고 조정하려고 하는 인정, 애정, 연민, 격려 등은 second love 이라고 합니다.
그런 Second Love 에는 항상 그림자가 있어서, 거절, 정죄함, 폭력, 미움 등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누구의 소리를 들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아니면 Second love 입니까? 요즘처럼, 코빗으로 인해서 더욱 더 고립되고
광야와 같은 시간과 공간에, 누구의 소리를 듣기를 원하십니까?
나를 인정해 주고, 좋게 평가하는 소리들 다 좋지요.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거절, 상처, 아픔이 뒤 따르게 됩니다. 코빗으로 고립되었을 때에, 오히려 그 고립을, 하나님만 구하고 찾는 영적인 solitude 으로 바꾸시길 바랍니다. Solitude 라 함은, 육체적인
고립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님만을 찾는 상태를 말합니다. Solitude
is being with God and God alone.
그래서,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고 딸이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광야에 있을지라도, 그 위의 하늘은 동일한 하늘입니다.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늘을 찢어 여시고, 여러분들에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와 같은 이 시간과 공간이, 물댄 동산으로 승화되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하셨던 말씀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직접 그리고 개인적으로
하신 말씀이었다 라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들으라고 공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랑만이, 우리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낼 수 있도록, 우리를 단단한 존재로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1월 9일 인너보이스의 묵상 내용이었습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다. 사랑은 우리를 담대하게 한다. 두려움을 이길 수 있다면 우리는 인생의 어떤
도전도 이길 수 있다.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 용기이고 용기를 주는 것이 사랑하는 마음이다. 사랑은 강하다. 사랑이 있을 때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광야는, 회개, 변화 그리고 준비의 기간입니다.
새해, 우리에게 open wide 의 주제를 주셨습니다. 광야같은
현실이지만, 하늘을 향해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우리에게
말씀하셔서, 우리를 강건하게 하실 것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지만, 저희 집이 2월말에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좀더 가까와졌습니다. 그래서 요즘,
틈틈이 짐을 정리하고 싸고 있습니다. 16년동안 살았던 살림이라 그런지, 버릴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하루는, 제 개인 짐을 정리하다가 매우 오래 전에 저의 부친께서 저에게 보내 주셨던 우편엽서를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영국 런던에 출장 중에 한국에 보내신 것인데, 날짜를 보니 1967년 11월 23일이었습니다. 제가 3살 되었을 때인데도,
마치 제가 글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적어 주셨습니다. 그 엽서 첫머리에,
“사랑하는 아들 수진에게” 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도 자식을 둔 부모가 되었지만, 어느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우편엽서를 대하는 저의 마음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일찍 돌아가셔서, 한번도, 아버지와 아들로서의 대화다운 대화나, 시간들을
보내지 못했었는데, 이 엽서의 한 문장이,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촛점을 맞추게 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깊게 깨닫고, 그 사랑만을 붙잡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 어려운 코빗 기간을, 참아내는 정도가 아니라,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의 사도, 요한도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삼서 1:2)
다시 예배 공동체로 온 교인이 모여,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는 그 날까지, 담대하고 강건하시길 바랍니다.